마쓰다이라 노부요시 (1824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1824년)는 가메야마 번 분가의 하타모토 마쓰다이라 쓰네히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43년 가메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주자번과 지샤 봉행을 역임했다. 1860년 로주 겸 외국사무취급으로 임명되어 안세이 대옥에 협력하고 영국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1861년 암살 위협을 받았고, 1863년 병을 이유로 로주직을 사임했다. 쇼군가에 대한 충절을 보였으며, 가계도에 따르면 쇼군가의 미다이도코로를 칭함에 따라 자신의 이름의 "아쓰" 자를 피하여 노부요시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막부의 외교관료 -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 근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실업가이자 사상가로,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 및 경영에 참여하며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창했고 사회 및 교육 사업에도 헌신했다. - 막부의 외교관료 - 안도 노부마사
안도 노부마사는 에도 시대 이와키 다이라 번의 번주이자 막부 로주로서,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하여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성사시켰으나,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실각하고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에 저항하다 패배하였다. - 가메야마번주 (단바국) - 아오야마 다다시게 (1654년)
아오야마 다다시게는 에도 시대 하마마쓰 번과 가메야마 번의 번주로, 농업 진흥에 힘썼으며 가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거 후 사망했다. - 가메야마번주 (단바국) - 마쓰다이라 노부유키 (1785년)
마쓰다이라 노부유키는 하타모토 마쓰다이라 쓰네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나 단바 가메야마 번 분가 출신으로, 제4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하고 종5위하 기이노카미에 서임된 에도 시대 인물이다. - 사쓰에이 전쟁 관련자 - 이노우에 요시카
이노우에 요시카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사쓰마 번 출신이며 보신 전쟁에 참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해군 대장과 원수까지 진급하여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 사쓰에이 전쟁 관련자 - 이토 스케유키
이토 스케유키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원수로, 사쓰마 번 해군에서 시작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원수 칭호와 백작 작위를 받았다.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1824년)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
다른 이름 | 도모사부로 (어린 시절 이름) 노부아쓰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출생 | 문정 7년 (1824년) 또는 문정 5년 2월 8일 (1822년3월 30일) |
사망 | 게이오 2년 1월 29일 (1866년3월 15일) |
묘소 | 교토부가메오카시 기타후루세정의 고추지 |
계명 | 청덕원검예준聳아봉 |
씨족 |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
관직 | |
관위 | 종5위하다지마노카미 이즈노카미 기이노카미 부젠노카미 종4위하시종 |
막부 | 에도 막부지샤부교 겸 소자반 로주 |
가계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요시히로 |
어머니 | 마쓰다이라 노부치카의 딸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 |
배우자 | 오타 스케히로의 딸 |
자녀 | 만치코 |
양자 | 노부토시 노부마사 |
봉록 | |
번 | 단바국가메야마 번주 |
섬긴 가문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이에사다 이에모치 |
2. 생애
분세이 7년(1824년) 하타모토 가문에서 태어나, 후에 단바 가메야마 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양자가 되었다. 덴포 14년(1843년) 양부의 뒤를 이어 가메야마 번주가 되었으며, 이후 주자번 겸 지샤 봉행, 오사카 성대 등 막부의 요직을 거쳤다. 만엔 원년(1860년)에는 로주 겸 외국 사무 담당으로 임명되어 막부 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 사카시타몬 밖의 변 등이 발생하는 에도 막부 말기의 혼란기였다. 양부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와 가까웠던 관계로 안세이 대옥에 협력한 것으로 여겨져 미토번 낭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실제로 암살 미수 사건을 겪기도 했다. 로주 재임 중에는 생맥 사건, 사쓰에이 전쟁 등 어려운 외교 문제 처리를 담당했으나, 양이 문제 등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 분큐 3년(1863년) 병을 이유로 로주에서 물러났으며, 게이오 2년(1866년) 양자 마쓰다이라 노부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직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가계와 출생
분세이 7년(1824년), 단바 가메야마 번 분가의 하타모토인 마쓰다이라 쓰네히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하타모토 마쓰다이라 노부치카의 딸이다. 후에 본가인 가메야마 번의 제6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양자가 되었다.구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쓰네히로 | 가메야마 번 분가 하타모토 |
어머니 | 마쓰다이라 노부치카의 딸 |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 | 가메야마 번 제6대 번주 |
정실 | 오타 스케히로의 딸 | |
자녀 (생모 불명) | 만센코 (딸) | 토키 요리토모의 정실 |
양자 | 마쓰다이라 노부토시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여섯째 아들 |
양자 | 마쓰다이라 노부마사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일곱째 아들 |
2. 2. 가독 상속과 번주 시절
분세이 7년(1824년), 가메야마 번 분가의 하타모토였던 마쓰다이라 쓰네히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본가인 가메야마 번의 제6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덴포 13년(1842년)에 종오위에 서임되었고, 이듬해인 덴포 14년(1843년) 2월 9일, 양부 노부히데가 은거함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아 가메야마 번주가 되었다. 번주가 된 이후, 가에이 원년(1848년) 10월 18일부터 안세이 5년(1858년) 11월 26일까지 주자번 겸 지샤 봉행을 역임하였다.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된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계도에 따르면, 안세이 3년(1856년) 8월 17일에는 조선인 내빙(朝鮮人来聘) 즉, 조선 사절단 접대 담당을 명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16일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또한 같은 날, 쇼군가의 어대소(御台所)가 된 아쓰히메(篤姫)의 이름에 포함된 '아쓰(篤)' 자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에 있던 해당 글자를 빼고 노부요시(信義)로 개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쇼군가와 아쓰히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
이후 막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안세이 5년(1858년) 11월에는 오사카 성대에 임명되었고, 만엔 원년(1860년) 12월 28일에는 로주 겸 외국 사무 담당으로 취임하였다.
노부요시가 활동하던 시기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 사카시타몬 밖의 변 등이 일어나는 등 막말의 혼란기였다. 그의 양부 노부히데는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와 인척 관계였고, 이 때문에 노부요시 역시 안세이 대옥에 협력한 바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그는 미토번 출신 낭인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분큐 원년(1861년) 6월에는 미토 번사 오치아이 요노스케가 노부요시의 등성 길을 노려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오치아이는 체포되어 이마바리번에 구금되었다.
또한, 노부요시는 생맥 사건과 그 배상금 문제, 사쓰에이 전쟁 등의 사후 처리를 위해 영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큐 2년(1862년) 5월 10일의 양이 실행 결정 전후에는 병을 핑계로 등성하지 않는 등[1], 재임 말기에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분큐 3년(1863년)에는 병을 이유로 로주 직책에서 사임하였다.
게이오 2년(1866년), 양자인 마쓰다이라 노부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은거 직후인 같은 해 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43세였다.
2. 3. 로주 취임과 외교 활동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 소장의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계도에 따르면, 안세이 3년(1856년) 8월 17일 소환되어 조선인 내빙(조선 통신사 관련 업무) 담당을 명령받았다. 같은 해 12월 16일 부역이 끝나 한바시 밖의 저택으로 돌아갔다.안세이 5년(1858년) 11월에는 오사카 성대에 취임했다.[1] 만엔 원년(1860년) 12월 28일, 로주(老中) 겸 외국사무취급(外国事務取扱)에 임명되었다.[1] 이는 양부 마쓰다이라 노부히데가 이이 나오스케의 인척이었던 관계로 안세이 대옥에 협력했던 배경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경위로 사쿠라다몬 밖의 변, 사카시타몬 밖의 변 등 혼란한 시기에 미토번 낭인들의 암살 표적이 되기도 했다. 분큐 원년(1861년) 6월에는 미토번사 오치아이 요노스케가 노부요시의 등성을 노려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오치아이는 체포되어 이마바리번에 맡겨졌다.[1]
로주 재임 중에는 생맥 사건과 그 배상금 문제, 사쓰에이 전쟁 등의 사후 처리를 위해 영국과의 교섭을 담당했다.[1] 그러나 분큐 2년(1862년) 5월 10일의 양이 실행 결정 전후에는 병을 핑계로 등성하지 않는 등[1], 재임 말기에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결국 분큐 3년(1863년) 병을 이유로 로주 직을 사임했다.[1]
2. 4. 암살 위협과 로주 사임
사쿠라다몬 밖의 변, 사카시타몬 밖의 변 등이 일어나며 에도 막부 말기의 혼란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노부요시의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히데는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와 인척 관계였고, 이로 인해 노부요시 역시 안세이 대옥에 협력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노부요시는 미토번 출신 인사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1]분큐 원년(1861년) 6월, 미토번사 오치아이 요노스케는 노부요시가 성에 등성할 때를 노려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오치아이는 체포되어 이마바리번에 넘겨졌다.[1]
로주 재임 중 노부요시는 생맥 사건 발생 후 영국과의 배상금 교섭 및 사쓰에이 전쟁의 사후 처리 등 어려운 외교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분큐 2년(1862년) 5월 10일, 양이 실행 결정 전후에는 병을 핑계로 등성하지 않는 등[1] 점차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분큐 3년(1863년), 병을 이유로 로주직에서 물러났다.[1]
2. 5. 은거와 죽음
게이오 2년(1866년), 양자인 마쓰다이라 노부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은거 직후인 1월 29일에 사망했다. 향년 43세였다.3. 쇼군가에 대한 충절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 소장의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계도 기록에는 노부요시의 쇼군가에 대한 충절을 보여주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안세이 3년(1856년) 8월 17일 소환에 의하여 조선인 내빙(来聘) 담당의 명령을 받다
: 같은 해 12월 16일 부역이 끝나 한바시 밖의 저택으로 돌아가 거주하다
: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쇼군가의 어태소(御台所) 아쓰히메(篤姫)를 칭함에 따라, 내가 "아쓰(篤)" 자를 피하여 노부요시(信懿)로 고치다
이 기록에 따르면, 노부요시는 안세이 3년(1856년) 당시 쇼군의 정실이었던 아쓰히메의 이름에 포함된 '아쓰(篤)' 자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에 있던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노부요시(信懿)'로 개명하였다. 이는 쇼군 가문과 아쓰히메에 대한 존경과 충성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또한 같은 해에 조선에서 온 사절을 맞이하는 직무를 맡았던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4. 계보
- 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히로
- 어머니: 마쓰다이라 노부치카의 딸
-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히데 (1813-1865)
- 정실: 오타 스케히로의 딸
- 생모 불명의 자녀
- * 딸: 만센코 - 토키 요리토모의 정실
- 양자
- * 아들: 마쓰다이라 노부토시 (1849-1865)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여섯째 아들
- * 아들: 마쓰다이라 노부마사 (1852-1909)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의 일곱째 아들
참조
[1]
서적
橘窓書影
[2]
문서
1822-03-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